덕수궁 중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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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편집]
YTN 공식 유튜브의 소개 영상. 중화전만 개별적으로 소개하는 영상이 없어 부득이 덕수궁 전체를 다룬 영상으로 대체한다. |
2. 역사 [편집]
원래 임진왜란 당시 임시 행궁이었던 경운궁은 인조 연간 이후 즉조당과 석어당 및 주변 별당 몇 채 빼고는 아무 것도 없던 궁이었다. 그러다 1896년(건양 1년)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 몸을 의탁했던 고종은 1년 뒤 1897년(건양 2년) 환궁[3]하면서 기존의 경복궁, 창덕궁이 아닌 근처의 경운궁을 선택했다. 하지만 몇 백 년을 버려진 곳을 임금이 거처로 삼으려니 대공사가 필요했다. 따라서 명목상으로는 중건이라 했지만 사실상 새 궁궐 하나를 창건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은 기존에 있던 즉조당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부르면서 정전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즉조당은 너무 좁았고, 규모있는 정전이 필요했다. 그래서 제국 선포 이후 5년이 지난 1902년(광무 6년)에야 정식 정전으로 지운 것이 중화전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기존에 있던 즉조당을 태극전, 중화전으로 부르면서 정전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즉조당은 너무 좁았고, 규모있는 정전이 필요했다. 그래서 제국 선포 이후 5년이 지난 1902년(광무 6년)에야 정식 정전으로 지운 것이 중화전이다.
중층 중화전 | |
《중화전도》 | 《중화전영건도감의궤 속 중층 중화전》 |
창건 당시에는 2층[5]이었으며, 겉모습이 창덕궁 인정전과 상당히 흡사했다. 그러나 1904년(광무 8년) 대화재로 불탄 이후 1906년(광무 10년) 중건했는데 재정 상의 문제 및 망국 직전 상황때문에 이전과 달리 단층으로 지었다.
이 곳에서 일어난 중요 행사는 1907년(광무 11년) 1월에 치러진,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 - 순정효황후의 결혼식과 1907년 7월에 열린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하는 의식[6]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한 이후, 일제는 1933년에 덕수궁을 공원화하면서 중화전 뜰의 박석을 걷고 잔디와 꽃을 심는 등 훼손했다. 8.15 광복 이후인 1980년대 말에 문화재관리국에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이 곳에서 일어난 중요 행사는 1907년(광무 11년) 1월에 치러진,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 - 순정효황후의 결혼식과 1907년 7월에 열린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하는 의식[6] 등이 있다.
일제강점기인 1919년에 고종이 승하한 이후, 일제는 1933년에 덕수궁을 공원화하면서 중화전 뜰의 박석을 걷고 잔디와 꽃을 심는 등 훼손했다. 8.15 광복 이후인 1980년대 말에 문화재관리국에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3. 정문 [편집]
4. 구조 [편집]
5. 여담 [편집]
6. 대중 매체에서 [편집]
[1] 건물과 문을 포함한 권역의 정식 등재명칭.[2] 중화문 포함. 문화재청의 공식 기준 참조.[3] 還宮. 궁으로 돌아가다.[4] 왜 이 현판이 즉조당에 걸리게 되었는지는 이 포스팅을 참고.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 중이다. 한 때 인터넷 상에서 중층 당시 중화전에 걸었던 현판으로 잘못 알려져 있었다. 참고로 중층 중화전 현판은 경운궁 대화재 당시 같이 불 타 없어졌다.[5] 보통 전통 건축의 경우 2층보다는 중층(重層)으로 표현한다.[6] 단, 이 때는 고종과 순종이 모두 불참했기에 내관들이 대리했다.(...) 결국 정식 즉위식은 동년 8월 27일 돈덕전에서 행했다.[7] 소의 혀란 뜻으로, 한식 목구조 공포에서 보 방향으로 첨차에 직교하여 거는, 끝을 소의 혀 모양으로 장식하여 오려낸 부재를 말한다.[8] 唐家. 옥좌 위에 다는 집 모양의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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